바람에 시를 싣다…간송미술관, 48년 만의 부채展 ‘선우풍월’

전시/공연 / 권수빈 기자 / 2025-04-08 09:53:40
  • 카카오톡 보내기
▲사진=간송미술관

[뉴스타임스 = 권수빈 기자]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48년 만에 부채를 주제로 한 특별전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을 열었다. 이번 전시는 조선과 청대, 근대 서화가들의 손끝에서 피어난 부채 서화 54건(55점)을 엄선해 선보이는 자리다. 1977년 이후 반세기 가까이 열리지 않았던 ‘선면(扇面) 서화’ 전시가 다시 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목이 쏠린다.

한국에서 부채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예물, 문인들의 교류 수단, 의례적 상징물로 발전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부채는 선비들의 풍류를 상징하는 매개였다.

‘하선동력(夏扇冬曆)’이란 여름에는 부채를, 겨울에는 달력을 선물한다는 풍속이다. 이는 정성과 교양의 표현이었다. 여름날 무더위를 잊게 하는 시원한 바람처럼 벗에게 시와 그림을 담은 부채를 선물하는 행위는 정신적 위안과 우정의 증표였다. 문인들은 부채 위에 시를 쓰고 화가들은 그 위에 난초·매화·대나무를 그렸다. 작은 선면 안에서 그들은 한 폭의 세계를 완성했다. 부채는 조선 지식인에게 시·서·화의 종합예술이자 품격과 인품의 상징물이었다.

간송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부채를 인간의 관계와 시대의 정서를 담은 예술 형식으로 조명한다. 간송 전형필의 컬렉션 형성과정 중 ‘유형(形態)’에 주목한 세 번째 기획으로, 2024년 ‘보화각 1938’, ‘위창 오세창’에 이어 서화의 형식적 다양성을 탐구한다. 1977년 선면 전시가 흑백 도판과 제한된 정보로 진행되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작품의 내력과 교류의 맥락을 세밀하게 밝힌다. 특히 추사 김정희의 ‘지란병문’, 단원 김홍도의 ‘기려원유’ 등 걸출한 서화가들의 부채 그림이 대거 공개eho 관람객은 한 점의 부채 속에서 조선 예술의 정수를 마주할 수 있다.

2층 전시실은 조선과 청대의 부채 서화로 채워졌다. 추사학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 문인들과 청나라 문사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다수 포함됐다. 청나라 문인 섭지선이 조선의 홍현주에게 선물한 ‘청죽(靑竹)’은 국가와 언어를 넘어선 문인 우정의 상징이다.
 

▲사진=간송미술관

전체 출품작 중 23점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19세기 문인 한용간의 ‘서호육교’나 윤정의 ‘삼오팔경’은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의 명승을 동경하며 그려 넣었던 ‘상상 여행’의 기록이다. 우봉 조희룡의 묵란화 변천을 보여주는 ‘분분청란’과 ‘난생유분’은 한 화가의 예술적 진화를 좇는 흥미로운 대비다.

1층에는 근대 서화가 김태석, 백윤문, 배렴, 이기우 등이 간송 전형필에게 선물한 부채 작품이 전시된다. 문화인들의 사적 교류에서 부채가 어떤 매개체였는지 시대의 감성을 보여준다.

부채는 바람을 일으키지만 동시에 바람을 담는 예술이기도 하다. 종이 위에 바람의 흔적을 남기고 그 안에 사람의 마음과 시간을 새겨 넣는다. 잔잔함 속에서 조선 선비들의 품격, 문인들의 우정, 예술의 겸허함이 고요히 피어난다.

뉴스타임스 / 권수빈 기자 ppbn0101@newstimes.press

[ⓒ 뉴스타임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카카오톡 보내기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