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T ZOOM:IN] 피아니스트 최희연, 10년의 사투 베토벤과의 대화
- 전시/공연 / 권수빈 기자 / 2025-04-06 10: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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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연합뉴스 |
[뉴스타임스 = 권수빈 기자] 피아니스트 최희연(57)은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장해온 연주자다. 그는 지난달 28일 10년에 걸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 프로젝트의 완결판인 ‘테스터먼트(Testament)’를 발매하며 다시 한번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거대한 작업에는 그의 삶과 음악 그리고 베토벤에 대한 신념이 집약돼 있다.
최희연의 음악적 출발은 6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시향과 협연하며 무대에 데뷔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이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성인이 된 후 그의 행보는 그 단어를 훨씬 넘어섰다. 1999년 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공개 오디션을 통해 임용된 교수가 됐고, 2023년부터는 미국의 명문 피바디 음악원 교수로 자리를 옮기며 국제적 활동 반경을 넓혔다. 2002년 금호아트홀에서 4년에 걸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를 매진 기록과 함께 완주하며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라는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그의 베토벤 여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2003년 첫 전집 녹음을 제안받았지만 결혼·임신과 함께 프로젝트가 중단됐고, 뒤이어 후원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다시 멈춰 섰다. 그는 당시 “아이 생명에 모든 것을 걸었던 시기였다”며 녹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2015년, 다시 독일 텔덱스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시작했으나 중간에 스스로의 연주력에 대한 회의감으로 작업을 멈춘 적도 있었다. 그는 그 과정을 떠올리며 “베토벤 소나타는 피아니스트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미치도록 사랑했기에 가능한 여정이었다”고 말했다.
길고 고된 여행을 끝까지 견디게 한 이유로 최희연은 가장 먼저 가족을 꼽았다. “남편이 육아를 모두 감당해줬다”며 아이 둘을 키우는 동안 긴 녹음 여정을 지속할 수 있었던 기반은 배우자의 전폭적인 지지였다고 고백했다. 또 한 사람은 그의 어머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어려운 시기를 버티게 했던 음악이 바로 베토벤이었다. 최희연이 베토벤을 떠올릴 때마다 “그 작곡가는 누구냐”라고 묻던 어머니의 모습은 오늘날의 최희연을 만든 감정적 원천이기도 하다.
최희연은 꾸준함, 깊이, 진정성으로 한국 클래식 피아니스트 계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화려한 테크닉을 앞세우기보다는 구조적 이해와 직관적 해석을 기반으로 한 연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베토벤과 브람스 같은 독일·오스트리아 레퍼토리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국내 젊은 연주자들에 대한 애정도 깊다. 임윤찬과 조성진을 비롯해 “반짝반짝한 별 같은 피아니스트들이 많다”고 말하며 이들을 위해 한국이 진정한 음악 문화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너무 많은 인재들이 경쟁에 눌리고 자신의 날개를 펼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음악을 단순한 현상이나 곡예가 아닌 깊은 문화로 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테스터먼트’라는 제목은 ‘증언’이자 ‘유산’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최희연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을 후대 음악가에게 남겨진 거대한 유산으로 바라봤고, 이 작품을 연주하고 기록하는 과정 자체를 자신의 증언 행위로 여겼다. 녹음은 독일 베를린 텔덱스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으며, 명 프로듀서 마틴 자우어, 베를린 필의 전속 조율사 토마스 휩시가 오랜 기간 함께했다. 전체 음반은 9장의 CD로 구성되었고, 사용한 악기는 오스트리아 명품 피아노 뵈젠도르퍼였다. 최희연은 왜 이 악기를 선택했는지 묻자 “뵈젠도르퍼는 한 음의 지속 시간이 길고, 칸타빌레 사운드가 뛰어나다. 베토벤이 꿈꿨을 소리를 구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악기라고 느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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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연합뉴스 |
그러나 음반의 본질은 기계적 완성도가 아니라 그가 베토벤과 맺어온 관계가 담긴 서사에 있다. 최희연은 “베토벤 음악은 항상 ‘문제’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이 너무 후련해서 카타르시스를 준다”, “어떤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그래서 베토벤이 천재라고 생각한다”고 베토벤이라는 음악가에 대해 정의했다. 최희연의 말처럼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에는 합창 교향곡과 이어지는 형제애, 평화, 인간 존엄성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오늘의 세계가 심각한 양극화와 분열을 겪는다는 점에서 이 음악은 과거의 작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위한 음악”이라고 말했다.
‘테스터먼트’를 통해 드러나는 최희연의 음악 세계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드라마투르기적 구조 감각을 통해 그는 베토벤의 악장을 ‘문제 제기와 해결의 여정’으로 해석하며, 음악 안에 숨은 인간적 드라마를 파헤쳤다. 또 최희연은 음악을 화려한 기술의 장이 아니라 정신과 의지의 기록으로 바라본다. 그는 “베토벤 음악에는 투지가 있다”고 말했다. 후기 소나타와 합창 교향곡의 메시지를 연결하며, 베토벤을 오늘 시대와 접속시키는 해석을 내놓았다. 앨범 내지 원고에서 32번 소나타 2악장을 설명한 문장도 최희연의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이 악장을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순수한 영혼의 노래이며, 마지막 주제는 ‘루드비히!’ 하고 불러주는 사랑의 목소리처럼 들린다”고 적었다.
음반 발매와 함께 최희연은 오는 10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리사이틀을 연다. 프로그램은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과 후기 소나타 30·31·32번이다. 그는 ‘발트슈타인’을 한스 라이그라프, 박성용, 문계 등 고마운 이들에게 헌정하는 마음으로 골랐다. 후기 소나타 세 곡에 대해서는 “웬일인지 최근 들어 가장 친밀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이라고 밝혔다.
최희연의 ‘테스터먼트’는 음악가로서의 그의 신념, 어머니와의 추억, 가족의 헌신 그리고 베토벤이라는 존재에 대한 ‘미칠 듯 깊은 사랑’이 한데 녹아 있는 작품이다. 한 음악가가 10년의 시간 동안 품고 있던 질문과 신념, 사랑의 결실을 귀를 통해 접할 수 있다.
뉴스타임스 / 권수빈 기자 ppbn0101@newstimes.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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